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옥관빈 피살사건 (문단 편집) == 여담 == [[백범일지]]에서 김구는 옥관빈을 독립운동 관련 인물로만 소개하고 옥관빈 피살에 대해선 침묵했다.[* 김구의 아들인 김신 역시 자신의 회고록에 옥관빈을 밀정으로 서술해 놓았다.] 김구의 아들인 [[김신]]의 회고록인 조국의 하늘을 날다에선 옥관빈을 친일 부역자로 서술하였는데 해방 후 김구의 행적 및 치하포 사건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 사자명예훼손 등의 명목으로 고소했던 전적을 보면 딱히 이상할 것도 없다. 인터넷에 검색해 보면 옥관빈이 [[친일파]]라는 글이 보이는데 출처를 추적해 보니 그런 사이트 중 일부가 [[루리웹]]으로 추정된다.--[[https://m.ruliweb.com/best/board/300143/read/42030310|#(삭제됨)]]--[[https://bbs.ruliweb.com/community/board/300148/read/32999240|#]][[https://bbs.ruliweb.com/community/board/300148/read/33215830|#]]--[[https://bbs.ruliweb.com/community/board/300148/read/34178152|#]]---^^글 삭제됨^^ 하지만 2009년에 출간된 [[민족문제연구소]]의 [[친일인명사전]]에선 옥관빈이라는 이름은 찾을 수가 없다. 상인이니 [[조선총독부]]와 경제적 교류를 했을 수는 있겠지만[* [[친일인명사전]]에서도 이런 점을 친일파의 기준으로 세우지 않는다. 수록 기준과 선정 기준을 참고하자.] 친일인명사전에 들어갈 [[친일반민족행위자]]는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.[* 물론 [[민족문제연구소]]도 인지를 못 해서 넣는 경우는 있을 수 있으나 김구의 인지도를 볼 때 인지를 못 했을 리는 없다.] 또 옥관빈의 6촌 재종형 옥성빈(玉成彬, 1885. 2. 26 ~ 1933. 12. 18)도 친일인명사전에서 찾아볼 수 없다. 그 외 설사 [[사전(책)|사전]]적인 의미의 '친일'이라고 판단할 만한 교류나 활동을 했어도 역시 그 정도는 [[친일인명사전]] 선정 기준 미달이다. KBS에서 시사기획 창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특집 - 밀정 2부작을 방송하며 밀정 명단을 공개했는데 거기에도 옥관빈과 옥성빈이 없다.[[https://news.naver.com/main/read.nhn?mode=LSD&mid=sec&sid1=100&oid=056&aid=0010732157|1부]], [[https://news.naver.com/main/read.nhn?mode=LSD&mid=sec&sid1=100&oid=056&aid=0010734391|2부]] [[위키백과]]에서도 옥관빈이 친일파라는 쪽에 무게를 두고 설명하고 있다.[[https://ko.wikipedia.org/wiki/%EC%98%A5%EA%B4%80%EB%B9%88|#]] 그런데 105인 사건을 함께 겪었던 윤치호가 그를 일본의 밀정으로 지목했다는 서술는 사실과 다르다. 되려 윤치호는 그가 밀정이라는 소문에 대해 >(1921년 4월 15일 요일) [[양주삼]] 씨 말로는, 옥관빈이 일본인들의 밀정으로 변신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한다.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얘기다. 옥씨는 내가 본 조선인 청년들 중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 중의 하나다. 그는 1911년부터 1915년 까지 음모사건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. 그때 그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큰 고통을 겪으면서도 비범하게 잘 견뎌냈다. 이런 유형의 인물이 반역자가 되었다는 걸, 난 도히 믿을 수가 없다.[* 김상태 편역, 윤치호 일기: 한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통해 본 식민지시기, 역사 비평사, 2001, 593쪽.] 라고 일기에 적었다. 옥관빈이 피살된 이후 여운형에게 그 소식을 듣고 >(1933년 8월 21일 월요일) 여운형 군이 강산 외금강에 가는 길에 잠깐 들렀다. 그는 옥관빈 씨가 1주일쯤 전에 상해에서 암살되었다고 말했다. 옥씨는 약을 특허 내고 사람들에게 사기를 쳐 돈을 번 후, 다년간 원한을 품은 이들의 표적이 되어왔다고 한다. 그는 공적인 대의명분을 위해 봉사하기를 거부했다고 한다. 그는 도와줄 법한 학생조차 도와주지 않았다고 한다. 그는 일본인들에게 잘 보여 자기의 신변을 보호해왔다고 한다.[* 김상태 편역, 윤치호 일기: 한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통해 본 식민지시기, 604쪽] 라고 들은 바를 그대로 받아 적은 것을 과대해석한 듯하다. 옥관빈의 7촌 재종질(再從姪) [[옥인찬]]은 부친 옥성빈과 7촌 재종숙 옥관빈의 암살에 김구가 연루되었다는 설이 있음에도 [[광복군]]에 복무하였고 [[8.15 광복]] 후 귀국해 성악가로 활약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